가슴에 와닿는 글귀
[스크랩] “가장 행복했던 7개월간의 사랑”
수채화같은 삶
2007. 9. 28. 14:58
여보,마누라!.
나 말야, 한국에 있을 때 상사로 섬겼던 분 한테 전화가 왔는데 한국으로 와 줄수
없냐고 하네. 어떻게 할까?
그렇게 시작된 집사람과의 대화
아무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집사람 말.
무엇 때문에 한국으로 가요.
이제 이곳, 일본에서 적응할 만 하고,말도 통하고,애들 학교공부도 잘 하는데…..
그리고 월급도 이곳이 많이 주지 않나요?
이렇게 집사람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나였다
그게 그런게 말이지, 어머니도 혼자 계시고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어느 한편으론 집사람을 이해를 해야 하나 좀 서운한 감도 있었다
생활의 편리함도 좋고 돈도 좋다지만 한국으로 가서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돌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자식 된 도리의 삶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연로 하셔서 점점 기력도 쇠하시고 또한 현재 아프시지 않은가?
집사람과의 끈질긴 줄다리기 속에 택했던 한국 행.
정확히 만4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의 평안함과 생활의 안정됨이 물 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회사 생활.예전의 그 직장,부서에 다시 복귀하니 어딘지 모르게 약간의 낮 설음이
있었지만 차츰 적응 해 나가고 있었다.
한국에 온지 15일째 되던 날.
출근 하려고 하니 어머니 방에서 인기척이 없다.
방문을 열어 보니 어머니가 쓰러져 계셔서 곧바로 119를 불러 응급실로 향하는데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
병원에 도착한 후 응급처치를 한 후 의식이 돌아온다
이때부터 어머니와 나와의 일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7개월간의 사랑이 시작된다.
만약에 일본에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가시고 난 후 발견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일주일,아니 한달 후가 되지는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교차한다.
갑자기 모든 분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한국으로 불러주셨던 직장상사 및 동료들.
그리고 좋은 환경,조건등을 포기하고 한국행에 기꺼이 결정을 해 준 집사람.
이 일이 있고 난 후 집사람은 한국으로 정말 잘 왔다는 말을 많이 했다.
이 후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다
매일 집에서 드문 불출하고 병원에서 입,퇴원을 반복했다.
직장생활 중 병간호 하기가 엄청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2006년 여름휴가 내내 병실을 지켰다.
어디 시원한 계곡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마음만 있을 뿐 현실은 그러하지가 못했다.
전북대 병원이 이제 나의 한 생활의 터전이 된 것 같았다
회사 마친 후 전북대 병원까지 가는 길.
오늘은 어머니 상태가 어떠했을까 하며 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다.
참 감사한 것은 회사 동료들의 배려가 나를 엄청나게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어느덧 2006년 가을의 문턱이 다 가오더니 금방 늦가을이 되어간다
병원 곳곳에 낙엽이 떨어지고 한산한 감마저 든다
주말에 날씨가 따뜻하면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앞 산책을 자주 가곤 했다
나의 맘엔 조금 밖에 못 살 것이란 생각이 있었는데 산책 하면서 어머니와 많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많이 한 것 같다.
주로 옛날 이야기.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손주들 커나가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참 좋아라 하셨다.
병원에서 간호 하면서 느꼈던 것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좀 더 성숙된 삶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투병하고 계시는 분들
몇 번이고 생사의 감림길에 서 있는 것을 많이 보았다
어느 한 분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구 당뇨병이 악화되어 신장 투석을 하고 있었다
투석을 한 후 기운이 쫙 빠진 상태로 병실에 들어 오는 그 젊은 환자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힘들어 보인다
응급실에도 있어 보았는데 그 곳은 정말 말 그대로 응급 환자 들이다
전기에 감전되어 응급실에 실려온 젊은 분,
의식이 없는 상태로 하루를 보내다 돌아가셨다
말없이 그분 옆을 눈물로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던 부인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한 환자가 하던 말도 기억난다.
하루만 온전하고 건강한 상태가 되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건강도 눈에 띄게 악화만 되어 간다
나도 이제 체력적으로 점점 힘들어 진다
퇴근 후 전북대 병원에 가서 밤새도록 병간호 하다 새벽 동이 터 오를 무렵 병실을
빠져 나와 다시 출근 하는 기간이 벌써 20일 째다
아침,저녁으로 전주,군산간 산업도로를 다니면서 생각하는 것.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또한 같이 있다는 것,그 자체만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렸을 때 보고 느꼈던 어머니의 커다란 둘레가 이제 노년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움츠려 드는것을 보니 “세월 앞에 장사 없구나” 하는 생각도 가져 본다.
또 다시 휠체어에 몸을 기댄체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어머니도 이제 점점 지치시는가 보다.
생각과 말도 똑 바로 하고픈데 그러지 못하는가 보다.
어느 날
병원에서 급히 전갈이 왔다
빨리 올 수 있냐고.
알았어요 하며 급히 달려 간 병실 문 앞
벌써 어머니는 임종을 했단다.
임종을 지켜 본 분들에 의하면 잠자듯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어쩌면 아들이 오기까지 인내했었을지도 모른다.
그 죽음을 알고 긴 호흡 한번 하며 억지로 생을 연장 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돌아올수도,돌이킬수도 없는 인생의 저편으로 가셨다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이라면 하루만 더 살아 계셨더라면 하는 작은 욕심을 가져본다.
그러면 어머니 옆에 꼭 붙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고 온 몸을 주물러 드리고 싶다.
이러듯 찬 바람이 휙 부는 1월 달.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일본에서 오고 난 후 꼭 7개월 만이었다
난 감사한다
주위 분들에게 감사를 한다
장례식장에 그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항상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신 상사분이 계시는데
그 분께 정말로 감사를 드린다.
어머니와의 7개월 간의 사랑을 하고 나니 세상의 사랑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누가 나에게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 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난 말이죠. 뭐랄까 그러니까요.
“어머니와의 나눴던 7개월간의 행복한 사랑이 아닐까 하네요”
하며 말하지 않을까 한다.
나 말야, 한국에 있을 때 상사로 섬겼던 분 한테 전화가 왔는데 한국으로 와 줄수
없냐고 하네. 어떻게 할까?
그렇게 시작된 집사람과의 대화
아무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집사람 말.
무엇 때문에 한국으로 가요.
이제 이곳, 일본에서 적응할 만 하고,말도 통하고,애들 학교공부도 잘 하는데…..
그리고 월급도 이곳이 많이 주지 않나요?
이렇게 집사람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나였다
그게 그런게 말이지, 어머니도 혼자 계시고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어느 한편으론 집사람을 이해를 해야 하나 좀 서운한 감도 있었다
생활의 편리함도 좋고 돈도 좋다지만 한국으로 가서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돌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자식 된 도리의 삶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연로 하셔서 점점 기력도 쇠하시고 또한 현재 아프시지 않은가?
집사람과의 끈질긴 줄다리기 속에 택했던 한국 행.
정확히 만4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의 평안함과 생활의 안정됨이 물 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회사 생활.예전의 그 직장,부서에 다시 복귀하니 어딘지 모르게 약간의 낮 설음이
있었지만 차츰 적응 해 나가고 있었다.
한국에 온지 15일째 되던 날.
출근 하려고 하니 어머니 방에서 인기척이 없다.
방문을 열어 보니 어머니가 쓰러져 계셔서 곧바로 119를 불러 응급실로 향하는데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
병원에 도착한 후 응급처치를 한 후 의식이 돌아온다
이때부터 어머니와 나와의 일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7개월간의 사랑이 시작된다.
만약에 일본에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가시고 난 후 발견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일주일,아니 한달 후가 되지는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교차한다.
갑자기 모든 분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한국으로 불러주셨던 직장상사 및 동료들.
그리고 좋은 환경,조건등을 포기하고 한국행에 기꺼이 결정을 해 준 집사람.
이 일이 있고 난 후 집사람은 한국으로 정말 잘 왔다는 말을 많이 했다.
이 후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다
매일 집에서 드문 불출하고 병원에서 입,퇴원을 반복했다.
직장생활 중 병간호 하기가 엄청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2006년 여름휴가 내내 병실을 지켰다.
어디 시원한 계곡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마음만 있을 뿐 현실은 그러하지가 못했다.
전북대 병원이 이제 나의 한 생활의 터전이 된 것 같았다
회사 마친 후 전북대 병원까지 가는 길.
오늘은 어머니 상태가 어떠했을까 하며 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다.
참 감사한 것은 회사 동료들의 배려가 나를 엄청나게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어느덧 2006년 가을의 문턱이 다 가오더니 금방 늦가을이 되어간다
병원 곳곳에 낙엽이 떨어지고 한산한 감마저 든다
주말에 날씨가 따뜻하면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앞 산책을 자주 가곤 했다
나의 맘엔 조금 밖에 못 살 것이란 생각이 있었는데 산책 하면서 어머니와 많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많이 한 것 같다.
주로 옛날 이야기.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손주들 커나가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참 좋아라 하셨다.
병원에서 간호 하면서 느꼈던 것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좀 더 성숙된 삶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투병하고 계시는 분들
몇 번이고 생사의 감림길에 서 있는 것을 많이 보았다
어느 한 분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구 당뇨병이 악화되어 신장 투석을 하고 있었다
투석을 한 후 기운이 쫙 빠진 상태로 병실에 들어 오는 그 젊은 환자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힘들어 보인다
응급실에도 있어 보았는데 그 곳은 정말 말 그대로 응급 환자 들이다
전기에 감전되어 응급실에 실려온 젊은 분,
의식이 없는 상태로 하루를 보내다 돌아가셨다
말없이 그분 옆을 눈물로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던 부인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한 환자가 하던 말도 기억난다.
하루만 온전하고 건강한 상태가 되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건강도 눈에 띄게 악화만 되어 간다
나도 이제 체력적으로 점점 힘들어 진다
퇴근 후 전북대 병원에 가서 밤새도록 병간호 하다 새벽 동이 터 오를 무렵 병실을
빠져 나와 다시 출근 하는 기간이 벌써 20일 째다
아침,저녁으로 전주,군산간 산업도로를 다니면서 생각하는 것.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또한 같이 있다는 것,그 자체만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렸을 때 보고 느꼈던 어머니의 커다란 둘레가 이제 노년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움츠려 드는것을 보니 “세월 앞에 장사 없구나” 하는 생각도 가져 본다.
또 다시 휠체어에 몸을 기댄체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어머니도 이제 점점 지치시는가 보다.
생각과 말도 똑 바로 하고픈데 그러지 못하는가 보다.
어느 날
병원에서 급히 전갈이 왔다
빨리 올 수 있냐고.
알았어요 하며 급히 달려 간 병실 문 앞
벌써 어머니는 임종을 했단다.
임종을 지켜 본 분들에 의하면 잠자듯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어쩌면 아들이 오기까지 인내했었을지도 모른다.
그 죽음을 알고 긴 호흡 한번 하며 억지로 생을 연장 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돌아올수도,돌이킬수도 없는 인생의 저편으로 가셨다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이라면 하루만 더 살아 계셨더라면 하는 작은 욕심을 가져본다.
그러면 어머니 옆에 꼭 붙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고 온 몸을 주물러 드리고 싶다.
이러듯 찬 바람이 휙 부는 1월 달.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일본에서 오고 난 후 꼭 7개월 만이었다
난 감사한다
주위 분들에게 감사를 한다
장례식장에 그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항상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신 상사분이 계시는데
그 분께 정말로 감사를 드린다.
어머니와의 7개월 간의 사랑을 하고 나니 세상의 사랑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누가 나에게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 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난 말이죠. 뭐랄까 그러니까요.
“어머니와의 나눴던 7개월간의 행복한 사랑이 아닐까 하네요”
하며 말하지 않을까 한다.
출처 : 맞벌이부부 10년 10억 모으기
글쓴이 : 그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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