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자락에도 봄빛이 돌건만 아직 찬바람은 두꺼운 오버코트를 벗기지 못하고 있다. 2009년 2월25일 수요일【문학의 집 서울】산림 문학관 수요문학광장에 92세의 황금찬 시인의 문학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문인들이 모여 들었다.
사회자 전옥주 【문학의 집 서울】사무처장의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다음은 황금찬(黃錦燦) 시인의 약연보이다.
․ 1918 8.10. 강원도 속초 출생.
․ 강릉에서 교직에 몸담은 이후 1951년 시동인 '청포도'를 결성해 활동
․ 1953년 《문예》와 《현대문학》을 통해 정식 등단
․ 중·고등학교에서 33년간 교사로 봉직.
․ 해변시인학교 교장, 시전문지『시마을』발행인 역임
․ 시집 : 1965 첫 시집 《현장》《5월의 나무》《오후의 한강》《산새》《구름과 바위》 《한강》《기도의 마음자리》《나비제》《별이 있는 밤》《조국의 흙 한줌과 아름다운 주검》《보석의 노래》《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잊지 못하는 것은》《사랑교실》《물새의 꿈과 젊은 잉크를 쓴 편지》《하늘에 걸린 정원》《겨울꽃》《구름은 비에 젖지 않는다》《오르페우스의 편지》《아름다운 아침의 노래》《별을 찾아서》《행복을 파는 가게》《물방울 속에 우주가 있다》《호수와 시인》《옛날과 물푸레나무》《어머니와 뻐꾹새》《음악이 열리는 나무》《공상일기》《고향의 소나무》등 시집 36권 발간.
․ 산문집 : 1965 첫 산문집 《실용문장법》《고독이 만든 그림자》《원고지에 그린 고향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그래도 별은 빛나고 있다》《사랑과 주검을 바라보며》《영원의 뜨락에 내리는 비》《들국화》《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로》《행복과 불행사이》《예술가의 삶》《나는 어느 호수의 어족인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 》《나의 서투른 인생론》《말의 일생》 등 24권의 산문집과 그 외 시론집, 시감상집 다수발간
․ 수상 :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문화보관훈장 수훈.
생명 / 황금찬
흙에서 나고 거기서 사는
나무와
풀은
흙을 닮지 않는다
풀과 나무에서 피는
꽃은
잎새들보다 아름답다
마음은
상념의 바다
물결은 쉬지 않는다
높고 위대한 파도는
사랑이다
별과 고기 / 황금찬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에
내려 앉는다
물고기들이
입을 열고
별을 주워 먹는다
너는 신기한 구슬
고기 배를 뚫고 나와
그 자리에 떠 있다
별을 먹은 고기들은
영광을 취하여
구름을 보고 있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 먹지만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떠 있다.
곧 바로 아직도 청년 못지않게 정정하신 황금찬 선생님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다음은 노시인이 하신 말씀을 메모하여 기록한 것이다.
시는 왜 쓰는가, 시는 양심이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그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 이런 말을 했다.
‘시인이 못 사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보름달과 어머니의 유방은 둥글고 아름답다. 시인에게는 양심이 있다. 시를 써 놓으면 그 속에 인격이 나타난다. 시인은 양심 속에 산다. 양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 시는 중국시를 베꼈고 현대시는 일본이 먼저 서양시를 받아들여 오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청년시절 요꼬하마에서 배를 타고 밀항하여 영국에서 겪은 이야기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돈이 가득 든 가방을 주워서 가방을 찾아가라고 써 붙였다. 그런데 돈가방 주인이 나타나서 칭찬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욕을 하고 때렸다.
“아, 누가 너 보고 가방 가져가라고 했어, 내가 가방 두고 볼일 보러 갔는데…, 나쁜 놈!”
‘아, 여기는 일본과 다르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돌아와서 명치유신이후 실권을 장악하고 한국침략을 하였다. 길가에 대소변을 보지 말고 큰 길 나갈 때는 신발을 신고 나가라는 명치천황이 칙령을 내릴 정도로 그 당시 일본사회는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던 미개한 시절이었다.
좋은 시는 첫째, 언어가 순화 된 아름다운 말이다. 성경에서 이런 아름다운 말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나무, 풀, 꽃은 누가 만들었나, 시인이 만들었다.
둘째, 시인은 사물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아름다운습성을 길러야 한다.
셋째, 시인은 생활의 예지가 있어야 한다.
시를 읽으면 읽은 사람의 표정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이야기, BC 2세기경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위대한 시인 굴원(屈原)의 어부사 (漁父辭) 고전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적에 어부가 그를 보고 말하였다.
“아, 이게 누구세요? 아, 높은 분이 어떻게 이곳에 와서 놀고 계세요. 어인 까닭이요?”
굴원은 " 세상이 다 미쳤네, 나만 미치지 않았어. 온 세상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니 그래서 추방을 당했소이다."라고 하였다.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의 변화에 따라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세속(世俗)의 먼지를 뒤집어쓴단 말이요?”라고 굴원이 대답하였다.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빠십시오,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세요."
마침내 청렴결백한 굴원이 5월5일 멱라수(汨羅水)에서 자살을 하였다. “고기들아, 이 떡 먹고 굴원의 시체는 건드리지 마라.” 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해마다 떡을 해서 그곳 강물에 뿌리며 굴원을 기렸다. 그래서 굴원이 자살한 5월 5일은 용선(龍船)축제가 있는 단오절이 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 신채호 40세 때 ‘내 나이 사십에 할 일이 무엇인가. 호숫가 잡초같이 시들어 가는구나.’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인류사회(人類社會)의 세계사라 하면 세계사류(世界史類)의 그리 되어온 상태(狀態)의 기록(記錄)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라고 역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우리역사의 정의를 잘 정리한 저서 《조선상고사》를 남겼다.
세 번째 이야기, 천하미인 왕소군은 전한의 원제(元帝)때 궁녀로 뽑혀 입궁하였다. 많은 궁녀 가운데 단 하루라도 황제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많은 궁녀를 화공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올리게 하여 마음에 드는 미인을 선택하여 곁에 두었다.
이런 관계로 궁녀들이 막대한 재물을 화공들에게 바쳐 자신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황제의 총애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미인인 왕소군은 자신의 용모와 비파실력을 믿었는지라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화공은 아리따운 용모를 추하게 그리고 점 하나까지 찍어서 황제에게 바쳤다. 이 때문에 왕소군은 황제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었다.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세력이 강성해지자 한나라의 원제에게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원제는 공주를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궁녀 중에서 골라 보내기로 했었다. 왕소군은 이런 소식을 접하고 한과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위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자신이 시집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원제는 변방무마책으로 궁녀 중에서 제일 못 생긴 궁녀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흉노의 사신을 불러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초상화를 보고 미리 정해 놓았던 왕소군을 불러 호한왕에게 시집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초상화의 주인공은 못생긴 줄만 알았는데 궁중의 절세가인이었다. 왕소군의 미색에 반해버린 원제는 시집보내기로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사신이 보는 자리에서 시집을 가라고 명하였으므로 번복할 수가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보았는데 왕소군의 초상화는 실제와 천양지차로 그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공 모연수가 황제를 기만한 것을 알고 분노가 치밀어 모연수와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들을 모두 참수하고 가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서기 33년 17세의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와의 화평을 위해서 흉노 호한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왕소군이 고국산천을 떠나 사신을 따라 멀고 먼 흉노의 나라로 시집을 갈 때 슬프고 원망하는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로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黎菜芙芙 (여채부부) 명아주 푸르러 무성하기도 한데
芳葉元黃 (방엽원황) 꽃다운 잎은 원래 누런색이었다네
有鳥此處 (유조차처) 새들은 이곳에 깃들었다가
集于苞桑 (집우포상) 뽕밭으로 모여든다지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아 있는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어 그만 땅에 떨어졌다. 이리하여 왕소군을 일러 낙안미인(落雁美人)이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일본의 간노도메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태백이 왜 태어났는가, 왕소군의 시를 쓰기 위해서 태어났다.’
왕소군 / 이백(李白)
1.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 왕소군은 안장을 떨치고
上馬涕紅頰 (상마제홍협) : 붉은 뺨에 목이 메어 말에 오른다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 오늘은 한나라 궁궐 여인이지만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 첩이 된다네
2.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 한나라 시절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 :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는구나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 한번 옥관의 길에 올라
天涯去不歸(천애거부귀) : 하늘 멀리 떠나간 뒤 다시는 못 온다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 한나라 달은 다시 동해에서 떠오르지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내일: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네
燕地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 오랑캐 땅은 늘 추워 눈이 꽃을 이루니
娥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땅에 묻혔으리
生乏黃金枉畵工(생핍황김왕화공) :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遺靑塚使人嗟(사유청총사인차) : 죽어서는 청총을 남겨 사람을 탄식하게한다.
네 번째 이야기,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이렇게 쓰여졌다.
도연명(陶淵明)이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은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직했다. 퇴직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도연명의 직속상관이 순시를 온다고 하면서 밑의 관료가 진언했다.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하십시오.”
“그놈은 나와 서당에 다닐 때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는데 내 월급 오두미(五斗米), 쌀 다섯 말 때문에 그 못난 놈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느냐, 내가 난 땅과 나무와 숲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도연명은 스스로 사임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병초의 아내가 남편을 맞이하고 막걸리를 한 되 사와서 아름다운 말로 위로 했다. 이리하여 유명한〈귀거래사(歸去來辭)>가 탄생한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 백낙천(白居易,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과 장한가(長恨歌)
“비파소리 누가 치는가.”
“늙은 기생입니다, 한때는 장안에서 제일 잘 치는 기생이었는데 지금은 늙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뱃사공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비파를 한번 켜 보너라.”
“늙어서 못 칩니다.”
그가 손을 잡고 현을 치니 밤 가는 줄 모르더라.
시인 백낙천은 현종이 양귀비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잘 표현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땅에 나면 연리지가 되자.” 라는 말은 이때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썼을까.
서양에서 낭만주의 사조가 꽃 피울 때 우리나라에는 1880년대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외국문학 영국시가 들어왔다. 당시 원산이북에는 장로교, 원산 이남에는 감리교 선교사가 들어왔다. 캐나다 선교사 로버트 그레슨(Robert Grierson: 구례선)은 1898년 9월 카나다 장로회에서 푸트(Foote.W.R)목사, 맥레(McRac.D.M)목사와 함께 한국에 파송되어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구례선(Robert Grierson)은 함경북도 남단 동해안에 있는 성진(城津)에 남녀공학인 보신학교와 협신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07년 성진공립보통학교, 보신여학교가 개교하였다. 구례선은 1934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선교와 교육에 충실하였다. 그는 1898년에서 1934년까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사건들을 에피소드별로 간략하게 자서전에 기술해 놓았다.
처음 선교사로 조선에 간다니까 친구가 조선인은 식인종이라면서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선교사가 원산 앞바다에 와 보니 조선 사람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고 천사 같이 보였다. 권총은 쓸모가 없을 것 같아 곧바로 바다에 던져버렸다. 후일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사실을 말하였다고 한다.
프랑스가 18C 중엽 낭만주의 꽃을 피울 때 근대시의 거장 일본의 기다하라하꾸슈(北原白秋)의 추천으로 정지용의 <향수>가 동인지 《학조(하꾸조 白鳥)》에 실려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기다하라하꾸슈(北原白秋 1885~1942)는 일본 규슈 후쿠오카(九州 福岡) 야나기가와(柳川)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동인지《빨간새》에 발표된 기다하라하꾸슈의 <고노미찌>는 우리의 윤동주 시인도 콧노래로 잘 불렀다는 시(詩)로서 일본 국민가요로 불릴 만큼 당시 수십만이 열광하며 불렀다고 한다. 한일문화교류협회회장 정명숙 수필가의 구술에 의존하여 <고노미찌>를 여기에 싣는다.
이 길(고노미찌)
기다하라하꾸슈 시/야마다(山田) 작곡 / 정명숙 번역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그 길
아, 그래요
아카시아 꽃이 피어 있던 길
저 언덕은 언젠가 본 언덕
아, 그래요
보세요, 하얀 시계탑을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그 길
아, 그래요
엄마와 마차타고 왔던 그 길
저 구름은 언젠가 본 구름
아, 그래요
버드나무가지가 흔들리고 있어요
어느 날 박종화 씨가 학생시절 술값은 방인근씨가 지불하기로 하고 친구 일곱 명이 술집에서 정지용의 시 <향수>를 낭독하기로 했다. 술집 기생이 원고지에 베껴주고 원본은 자기가 접어 가슴에 넣고 말했다.
“오늘 선생님들 모신 영광은 잊을 수가 없어요. 술값은 제가 다 내겠어요.”
이 얼마나 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인가.
향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928년 이후 일제의 징병, 보국대에 끌려갈 때 서정주의 <귀촉도>를 , 1940년 일제가 우리의 창씨개명을 요구하며 억압했을 때에는 김광균의 <향수> <설야>가 낭송되었다.
귀촉도(歸蜀道) /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銀粧刀)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향수(鄕愁) / 김광균
저물어 오는 육교 우에
한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람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매기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 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프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 오기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어느 날 황금찬 선생님은 존경하는 시인 김광균 시비 앞에 꽃다발 하나가 없어 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혜화전철역 샘터 앞쪽에 있는 시비 <설야(雪夜)> 앞에 화분 하나를 갖다 놓았다. 우이동 집에 가면서 ‘누가 가져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 시비(詩碑)앞에 가보니 화분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름다운 말, 아름다운 마음을 위해서 우리 어머니들, 어린이에게 흔드는 것 가르치지 말고 동화나 동시를 가르쳐 주세요.”
이 부탁말씀은 강한 메시지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문학사에 대한 황금찬 시인의 소중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인터넷 독자와 방청석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1.다시태어나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요?
“영원히 시를 쓸 것입니다, 시인의 역할에 감사합니다.”
2. 60여권의 시집을 출간되었는데 앞으로 시집 계획은 언제 쯤 될까요?
“산문집은 아직 계획 없고 내 시집이 안 나오면 죽은 줄 아세요.”
3. 몇 편의 시를 외우실 수 있고 가장 좋은 낭송시는 어떤 것인가요?
“목월선생의 시가 잘 맞아 좋아합니다. 외는 시는 한번 외웠다가도 가만있으면 잊어버리니 다시 챙겨야 합니다. 비교적 마음에 맞는 시라야 잊지 않습니다. 잘 외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시 100편쯤 베껴서 아침마다 읽습니다. 번역잘 된 외국시도 낭송하지요.”
“시집은 5000권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시집 1000권을 읽어라.’ 했습니다. 1941년 4월에 일제가 우리 잡지, 신문 모두 없애 버렸습니다. 1942년 서울에 사는 조지훈 시인이 경주의 목월 선생에게 편지로 <완화삼>을 써 보냈습니다. 이에 답신으로 시 <나그네>를 목월이 보내왔습니다. 경주박물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두 분이 처음 만나서 낭송한 시들입니다. 우리 시 역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 보물입니다.”
황금찬 노시인은 우리 현대시의 산 역사입니다.
중간 중간 시낭송을 곁들인 특강은 시종일관 긴장된 시간이었습니다. 이 소중한 말씀을 아름다운 우리말을 마음껏 쓸 수 있고 마음대로 표현 할 수 있는 행복한 시대, 황금찬 노시인의 바람처럼 아름답게 시를 쓰고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낭독해야겠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바르게 기록하기 위하여 두 차례 선생님과 짧은 전화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평소 애송하시는 시를 꼭 짚어 말씀해 주십사 부탁드리니 위에서 거론한 시(詩)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명이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빛나는 이름이라고 생각되어 황금찬(黃錦燦) 선생님께 본명인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말씀인즉 선생님 어머님께서 선생님을 낳고 보니 영양실조가 몹시 심하였다고 합니다. 금방 죽을 정도여서 큰아버지께서 이름 덕이나 보라고 지어주신 본명이랍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삶을 사시는 황금찬 선생님 감사합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이 되시기를 빕니다.